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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살이 11년, 허수경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변함이 없다. 여전히 고즈넉하고 푸른 제주처럼 그녀는 변함이 없다.

On December 20, 2016

 

허수경은 11년째 제주에 살고 있다. 엄마의 고향이자, 어릴 적 외할머니 집에 왔을 때 보았던 제주 바다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육지와 떨어진 섬. 혹자는 그 차단이 힘들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래서 더 좋다.

벌써 11년째네요.
저라는 사람은 힘들 때 누구를 붙잡고 물어보는 성격이 아니기에, 그 해소의 대상이 자연이에요. 내가 사는 제주는, 지나가다 옆으로 쓱 빠지면 바다이고 숲이어서 마음만 먹으면 일상과 자연이 밀접하게 맞닿아 있죠. 그래서 좋아요. 아, 비행기 타는 시간도 좋아해요. 오롯이 생각에 집중하는 시간이거든요.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삶이에요. 일주일 플랜도 궁금해요.
반은 제주도에서, 반은 서울에서 지내는데, 제주도에 있다 보면 서울에서 하는 일들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고, 또 그 일이 지칠 때쯤 다시 제주에 와서 맘껏 놀죠. 저와 제주는 이렇듯 너무 잘 맞지만, 사실은 누구에게나 다 잘 맞는 건 아니에요. 자연 속에 있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건 같으니까요. 고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제주도로 오는 건 위험하다는 거죠. 먹고사는 문제는 도시에서나 이곳에서나 부지런해야 하고, 자기만의 아이템도 있어야 해요.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그간의 삶에 변화는 없었나요?
보시다시피 집을 확 줄여 이사했어요. 여행하듯 살고 싶어 제주도로 왔는데, 그 삶도 오래되다 보니 여행지가 아니라 집이 되더라고요. 어느 나라 할 거 없이 쓰레기가 골치인데, 지금 내 한 몸 살자고 필요한 물건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건을 줄이면 쓰레기도 줄어들 거고, 환경 파괴도 줄어들 거고…. 뭐 그런 아주 작은 모기 한 마리의 생각이지만 실천해봤어요. 실평수 15평, 살아보니 너끈해요.

또 다른 변화는 없나요?

딸이 수도권의 학교로 전학을 갔어요. 물론 아이가 원해서. 아이에겐 엄청난 변화가 있었어요. 일단 말 줄여 쓰는 걸 끝장나게 하고요,(웃음) 그 짧은 시간이지만 유행어와 아이돌 언니 오빠의 이름을 줄줄 외워요. 제주에서의 친구 관계는, 느끼는 대로 했기 때문에 진실되면서도 미숙했는데 도시에 살면서 또 다른 친구 관계 요령을 터득한 것 같아요. 어느 날은 아이가 학교에 다녀오더니 “엄마, 분명히 어제 친구가 나랑 단짝하자고 했는데 오늘은 모르는 척을 해” 하는 거예요. 딸은 친구의 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단짝, 그러니까 깊은 관계를 원해요. 그것 때문에 한동안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도시 아이들과 비슷하게 지내고 있어요. 좋은 환경, 상처 받지 않는 환경이 능사가 아니니까 그런 경험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내년엔 다시 제주로 돌아와 학교에 다닐 거예요.

아이가 원하는 바인가요? 
그럼요. 주말이면 제주도에 오는데, 제주 친구들을 만날 때면 30년 만에 상봉하는 이산가족처럼 부둥켜안고 난리가 나요. 서울에 있으면 학교, 학원, 집 외엔 갈 곳이 없고, 그래서 TV 보는 시간과 스마트폰을 하는 시간이 많죠. 제주에 오면 하루 종일 뛰어다녀 찾을 수 없는 아이인데 서울에선 그게 안 되니까 본인이 답답한 거죠. 그럼에도 아이 문제는 흘러가는 게 답인지라, 엄마가 결정해놓고 맞춘다고 되는 일이 아니에요. 저는 그 문제만큼은 무식하리만큼 열어놓은 사람이라,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요.

서울에서의 일정은 어떤가요?
애초에 제주에 올 때 농사를 짓겠다고 했는데, 아이가 크니까 불안한 마음도 생기고, 나이도 실감하게 되니까 일 욕심을 쉽게 접을 수가 없네요. 서울에서 보내는 사흘은 방송과 관련된 일을 해요. 시간 절약형으로 스케줄을 짜니 가성비가 높죠. 그래서 제주에 오면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걸 다해요. 돈도 펑펑 써요.

이상적인 삶이라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생각한 대로 살기 위해 노력을 해요. 그래서 큰 결정을 내렸어요. 내년 연말에 유럽으로 안식년 여행을 갈 생각이에요. 우리 삶이 오죽했으면 ‘멍 때리기 대회’를 할 정도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 온 거잖아요. 저 역시 늘 두 가지 이상의 일을 하고 있고, 그런 제 모습을 보는 남편은 숨이 차다고 표현하죠. 그러던 차에 교수인 남편에게 안식년의 기회가 왔고, 남편이 제안해 세 가족이 안식년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사실 애초에 남편은 ‘이 사람이 그 많은 일을 다 놓을 수 있을까’ 싶어 조심스레 물어봤는데, 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자리에서 예스! 그덕분에 요즘 무지 바빠요. 1년 쉰다는 생각에 할 게 너무 많거든요(웃음). 

기존 벽지 인테리어의 상식을 깨고 선과 그림을 그린 딸의 방.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기존 벽지 인테리어의 상식을 깨고 선과 그림을 그린 딸의 방.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기존 벽지 인테리어의 상식을 깨고 선과 그림을 그린 딸의 방.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메인 컬러는 블루. 곳곳에 취향이 묻어나는 타일로 색감의 재미를 더했다.

메인 컬러는 블루. 곳곳에 취향이 묻어나는 타일로 색감의 재미를 더했다.

메인 컬러는 블루. 곳곳에 취향이 묻어나는 타일로 색감의 재미를 더했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이 되겠네요.
내년 7월에 남편이 먼저 가서 준비를 해놓고 저와 딸은 겨울에 갈 생각이에요. 다행히 딸은 학교를 일 년 빨리 입학한 상태라 큰 무리가 따르지 않을 것 같아요. 한 도시에서 적어도 보름씩 혹은 한 달씩 지내면서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을 만들고 싶어요. 딸도 오롯이 ‘놀게’ 내버려둘 거예요.

아, 새로운 브랜드도 론칭했죠?

‘반함’이라는 철릭, 그러니까 생활 한복 브랜드를 론칭해 소소하게 판매하고 있어요. 우리 한복은 조금만 변형시키면 생활 속에서도 충분히 멋스럽고 편히 입을 수 있어요. 일본에 가면 젊은 친구들이 특별한 날 전통의상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데, 우리는 우리 옷을 입는 젊은 친구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죠. 그래서 시작한 일이에요. 소품을 만드는 브랜드 ‘바탕’도 소박하게 오픈했어요. 어릴 때부터 손으로 오밀조밀 만드는 걸 좋아했는데, 결국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네요. 제 나이 50에 사업을 시작하면서 돈벌이에만 치중하는 일을 하는 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어 제주도 집 근처에 소박하게 가게를 오픈하며 시작했어요. 다행히 많은 분이 찾아주셔서 기분 좋게 일하고 있어요. 디자이너 허수경입니다.(웃음)

어제 택시에서 KBS2 라디오 <허수경의 해피타임 4시>를 들으면서 왔어요. 대화하는 느낌이 들던데요.(웃음)
제게 무척 특별한 방송이에요. 게스트 없이 진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데도 청취율이 무척 높고(최근엔 해피FM 청취율 1위를 기록했다), 청취자와 ‘진짜’ 소통하는 방송이에요. 좋은 책 한 권을 읽는 듯한 배움이 있어요. 작은 것이 주는 행복과 슬픔을 청취자들과 나누고, 그 가르침을 저 역시 배워갑니다. 그 외에도 홈쇼핑에 출연하고 있고, 더빙하는 프로그램도 하나 있고, 그 와중에 한복까지 만드는 저를 보고 남편이 두 손 두 발 다 들었죠.

그 놈에 일복…(웃음)
그러니까요.(웃음) 남편 소원은 제가 일찍 잠자리에 들고 일찍 일어나는 건데, 전 그게 너무 힘들어요. 방송이라는 게 1분 1초도 실수하면 안 되잖아요. 집중해서 일하다 보면 다른 일은 생각할 수가 없고, 그래서 방송 외에 나머지 일들이 떠오르는 시간이 밤이에요. 성격상 생각이 나면 기록을 해둬야 하니 늦게 잘 수밖에요.

그나저나 느지막이 시작한 결혼 생활은 어떤지요?
저도 남편도 서로 마음에 안 들고 못 마땅한 게 많겠죠. 그때 서로 봐주는 마음이 생기는지 아닌지가 관건인데, 다행히도 저와 남편은 그 마음이 생겨요. 남편은 비평하는 시각을 가진 사람이고, 저는 뒤통수를 맞아도 좋게 보는 사람이에요. 언젠가 제가 남편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직업적인 파트 이외의 나머지 인간관계는 허술한 게 좋아. 굳이 각을 세우고 틀을 맞추고 평가와 판단을 하는 것도 좋아 보이지 않아. 손해 보고 뒤통수 좀 맞으면 어때? 믿어줬다고 크게 손해 봐? 그냥 냅둬.” 사실은 저한테도 학생 다루듯 그렇게 가르치려 들었거든요. 예전에요.(웃음)

받아들여졌나요?
남편의 변화는 일취월장이에요. 근데 그게 나만 열심히 해서 되는 문제는 아니에요. 예전엔 제가 일을 무리하게 하다가 몸에 탈이 나면 “내 그럴 줄 알았어!” “도대체 몇 시야?” 했던 남자인데 지금은 “힘들겠다, 어서 자”로 바뀐 거죠. 그리고 잠이 들 때까지 발 마사지를 해줘요. 너무 많이 변했죠? 물론 사람은 바뀌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특유의 날 선 성격은 버릴 수 없지만 대하는 자세와 태도가 바뀐 거죠. 똑같은 사람인데 부딪힘이 적어요. 나이 들어 만나 서로에게 뭘 그렇게 큰 걸 바라요.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것도 고맙지.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사랑하는 방식은 ‘렛 잇 비’예요. 대세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가 제가 사랑하는 방식이죠. 성향이 달라 애초에는 부딪혔지만 지금은 서로를 받아들이고, 넘어가줘요. 편안해요.

아빠와 딸 사이는 어떤가요?
그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나와 딸은 이미 끈끈한 스킨십이 있기에 제가 딸에게 어떤 짓을 해도 둘 사이엔 믿음이 있어요. 하지만 이 사람은 아니잖아요. 게다가 경상도 남자예요. 한마디를 해도 툭툭 하고, 성향 자체가 드라이하죠. 저와 딸은 촉촉한 걸 원하는데 말이죠. 그것 때문에 아이도 스트레스 많이 받았어요. 둘이 있을 때 아빠가 놀아주지도, 쳐다보지도 않고 스마트폰만 본다는 거예요. 지금은 서로 함께하는 법을 터득한 것 같아요. “아빠는 왜 엄마만 좋아해?” “엄마 것만 왜 사줘?” “엄마가 없을 때는 왜 나한테 잘 안 해줘?” 그러니 어떻게 당해요.(웃음) 엊그제는 딸아이가 갖은 애교로 아빠를 꼬셔 백화점에 데리고 가더니 겨울 외투를 하나 사 입고 왔더라고요.

그렇게 진짜 가족이 됐네요.
서로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부부 싸움을 할 게 없지요. 저희는 부부 싸움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할 때 크게 했거든요. 딱 세 번. 세 번째에 종결됐어요. 늦게 만나서 뭘 잘났다고 서로에게 요구할 게 그리 많았을까요. 서로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고맙죠. 저희 그렇게 살아요.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페퍼민트 향 가득한 제주 공기다. 허수경은 그렇게 제주에서 빛나는 50대를 맞이했다.

좋아하는 컬러를 다양하게 썼다. 그래서 ‘보고 싶은 집’으로 만들었다.

좋아하는 컬러를 다양하게 썼다. 그래서 ‘보고 싶은 집’으로 만들었다.

좋아하는 컬러를 다양하게 썼다. 그래서 ‘보고 싶은 집’으로 만들었다.

CREDIT INFO
취재
하은정 기자
사진
하지영
의상 협찬
‘반함’ 철릭
2016년 12월호
2016년 12월호
취재
하은정 기자
사진
하지영
의상 협찬
‘반함’ 철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