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지칠 때면 몸은 남쪽 땅으로 기운다. 멀리 떠나고 싶다, 푸르고 넉넉한 자연에 안겨 쉬고 싶다는 열망이 등을 떠미는 것이다. 고맙게도 KTX 전라선 열차가 달뜬 몸과 마음을 빠르게 날라 주었다. 이번 남쪽 여행의 목적지는 전남도립미술관. 순천역에서 77번 버스를 타고 광양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면 길 건너에 미술관이 있다. 수호신처럼 건물을 지키고 선 그자비에 베이앙의 빨간 ‘새(Bird n°2)’가 낯선 손님을 마중하며 인사를 건넨다.
옛 광양역 자리에 올라선 전남 미술의 허브
투명한 전면 유리 외관에 뽀얀 뭉게구름과 초록빛 잔디가 어른어른 비친다. 완연한 여름. 미술관에서 한나절 보내기 좋은 계절이 왔다.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의 늠름한 풍채를 자랑하는 전남도립미술관은 2021년 3월 옛 광양역 부지에 올라섰다. 전남 최초로 들어선 현대미술관이니만큼 지역민의 이목이 쏠린 건 당연했다. 개관 기념전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다>부터 미술계의 전무후무한 인플루언서 BTS RM이 방문한 <인간의 고귀함을 지킨 화가 조르주 루오>전까지, 그간 전남도립미술관이 선보인 전시 면면은 과중한 기대를 가뿐히 뛰어넘는 성취였다. 개관 3년 차, 전남도립미술관은 지역 안팎의 미술 애호가를 불러 모으는 예술적 구심점으로 거듭났다. 미술사적 가치가 큰 지역 작가의 작품을 수집·연구하며 내실을 다지는 동시에, 한국 미술과 세계 미술을 연결하려는 바지런한 움직임이 이루어 낸 결과다.
묵직한 유리문을 밀어 햇살이 쏟아지는 환한 로비에 발을 디딘다. 그런 뒤엔 곧장 아래층으로 난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전남도립미술관의 주요 전시가 열리는 곳은 지하 1층이다. 성큰 구조로 이루어진 미술관 건물은 지하라도 채광이 풍부하다. 장미셸 오토니엘의 ‘블랙 토네이도’와 자연광이 공존하는 공간은 더없이 신비로운 공기를 자아내고, 지하 정원에 설치한 여수 출신 조각가 류인의 ‘지각의 주’는 정적인 풍경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이토록 오묘한 예술의 바다, 영원의 꽃
7월, 전남도립미술관을 찾는다면 바다에서 헤엄치고 꽃밭에서 노니는 잊지 못할 경험을 한다. 바다를 소재로 한 아시아 지역 작가의 작품을 그러모은 <아시아의 또 다른 바다>전, 생과 사의 철학을 꽃으로 관통하는 <영원, 낭만, 꽃>전이 열리기 때문이다.
먼저 바다로 뛰어든다. 이 바다는 예사 바다가 아니다. 별처럼 산재하는 아시아 각지의 작가와 예술 작품을 잇는 거대한 우주로서의 바다다. 첫 번째 장, ‘파(波), 바다의 파동’은 전시장에 들어선 관람객을 단숨에 매혹한다. 수조에서 노니는 금붕어와 TV 브라운관 속 금붕어 영상을 중첩한 백남준의 ‘TV 물고기’, 미술관 인근 바다에서 추출한 음역을 파동으로 시각화한 천위룽의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 작업 ‘남해’가 온 감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다음 섹션인 ‘몽(夢), 바다와 꿈’에서는 바다가 환기하는 여러 가지 꿈의 형태를 만난다. 경남 거제에서 출발한 한국의 김승영과 일본 쓰시마섬에서 출발한 무라이 히로노리가 접경 해협에서 만나는 퍼포먼스 ‘바다 위의 소풍’을 맞닥뜨린 순간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른다. ‘초(超), 바다 너머’는 바다의 심상을 경유해 당대를 초월한 작가의 혜안과 통찰을 엿보게 한다. 특히 전통 수묵의 이념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웬훼리의 ‘화묵·곽희 ‘조춘도’ No.2’와 ‘원씨준보’가 색다른 울림을 안긴다.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마지막 무대, ‘경(境), 바다와 경계’다. 전남 신안 안좌도가 배출한 거장 김환기의 ‘14-XI-69#137’은 전면점화로 그려 낸 검푸른 바다 같다. 그림 앞에 서면 어쩐지 바람 소리, 파도 소리가 귓가에 스치는 듯도 하다.
바다를 건넜으니 꽃을 끌어안을 차례. <영원, 낭만, 꽃>전은 꽃이 품은 영원성과 낭만성을 탐색한다. 우선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이기도 한 해남 대흥사 ‘십일면천수관음보살도’가 첫 번째 전시실 ‘연화화생, 재생의 염원’을 온화한 기운으로 가득 채운다. 연꽃으로 출발한 전시는 병풍, 보자기, 꽃신 등 일상적 소품과 프랑스의 장식 예술 박물관인 모빌리에 나시오날에서 공수한 태피스트리를 아우른다. 대단원은 제니퍼 스타인캠프의 미디어 아트 작업 ‘미래로부터’, 제임스 로젠퀴스트의 ‘무제(장미)’, 박기원의 ‘대화’에 이르는 동시대 작품이 장식한다. 천변만화하는 꽃, 그 속에 깃든 삶과 죽음과 영원의 가능성을 한껏 긍정하게 하는 순간이다.
돌아가는 걸음에 놓인 예술
다시 1층으로 올라간다. 로비 한편엔 <기증 작품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윤선도와 윤두서의 후손이기도 한 남도의 현대미술 1세대 작가 귤원 윤재우의 작품을 만나는 기회다. 선명하고 화려한 색채로 표현한 풍경화와 정물화는 어제 그린 그림이라고 해도 이질감이 없을 만큼 앞서간 조형 감각을 보여 준다.
‘뮤캉스’의 시간을 갈무리하기 위해 카페 겸 아트 숍 ‘플랫폼 660’에 잠시 머물기로 한다. 미술관 소장품 이미지로 디자인한 필기구, 스카프, 가방을 뒤적거리다가 김환기의 ‘무제’ 엽서를 발견했다. 오래도록 곱씹고 꺼내 볼 또 하나의 추억을 손에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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