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K의 시대, K-콘텐츠는 어떻게 지구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이 말했듯 훌륭한 ‘퀄리티’가 주효했겠으나, 여기선 조금 다른 주장을 제시하고 싶다. 전 세계 각지에서 K-컬처를 체현하며 살아가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존재감, 그것이 오랜 세월 축적되어 K-콘텐츠가 만개할 옥토를 일군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란 한반도에서 살다가 세계 각지로 흩어져 정착한 이민자와, 이들이 경험하는 문화·민족 정체성 혼란이나 차별 문제를 아우르는 표현이다. 법적으로는 이들을 재외 한인, 혹은 재외 동포라 정의한다. 대한민국 외교부는 ‘재외 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에 따라 재외 국민과 외국 국적 동포(시민권자)를 모두 재외 동포로 규정하고 있다.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 재미 동포 1세대 가족 이야기를 그린 영화 <미나리>에 등장하는 대사다. 척박한 땅에 뿌리내려 의연히 삶을 일궈 온 732만* ‘미나리들’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기구하고 눈물겨운 방랑기를 담은 K-디아스포라 콘텐츠를 그러모아 본다.
⁎ 2021년 기준으로 전 세계 재외 동포는 약 732만 명이며 지역 비중은 미국, 중국, 일본 순으로 많다.
가깝고도 먼, 일본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됐다. 일제의 수탈과 폭정을 버티다 못한 한반도 땅의 민초들은 먹고살 길을 찾기 위해 일본 열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1930년대부터 비상 전시 체제에 돌입한 일제는 한인들을 건설 노무자로 강제 동원했다. 쓰라린 시절이었다.
1945년 광복 이후 대다수 이주자는 고향 땅을 밟았으나, 약 60만 명은 저마다 복잡다단한 사정 때문에 일본에 잔류하기로 한다.
이들이 바로 재일 동포, 자이니치(在日) 1세대다.
#1920~1930년대
이민 1세대와 간토 대지진
소설 원작 드라마 <파친코>는 1930년대 부산 영도와 1980년대 일본 오사카를 오가며 재일 동포 가족 3대의 이야기를 그린다. 일제강점기, 하숙집 딸 선자는 생선 중개상 한수와의 사랑에 실패하고 목사 이삭과 결혼해 일본 오사카로 이주한다. 이상주의자 이삭이 경제활동에 기여하지 못할 때, 선자는 어떻게든 입에 풀칠하기 위해 김치를 담가 판다. 드라마는 한수의 과거도 조명한다. 그는 제주도 출신으로 일본 오사카에 건너가 자수성가한 인물인데, 성공 이면에는 간토 대지진 당시 횡행했던 조선인 무차별 살해 사건의 생존자라는 어두운 전사가 있다. 영화 <피와 뼈>는 한수와 여러 면에서 유사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재일 동포 감독 최양일이 연출하고, 배우 기타노 다케시가 제주 출신으로 오사카에서 기반을 닦은 사내 김준평을 연기한다. 영화는 김준평의 정착과 성공, 그가 휘두르는 폭력과 착취, 그에게 닥친 고초와 수난을 쓰라리게 묘사한다.
#1950~1960년대
차별과 갈등, 그리고 분열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기 전인 1950년대, 재일 작가 야스모토 스에코의 일기를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영화화한 <작은 오빠>는 일본 사회에 재일 문제라는 묵직한 화두를 던졌다. 불황기에 접어든 일본 사가현의 탄광에서 한 재일 노동자가 사망하면서 이야기는 출발한다. 슬하의 네 아이는 생존을 위협당하고, 장남 기이치가 아버지의 직장이었던 탄광에 취직하려 하지만 ‘조선인은 감원 대상 1호’라는 말을 듣고 쫓겨난다. 곡절 끝에 기이치는 파친코 업소에 취직해 생계를 잇는다. 한편, 1955년에는 재일 한인 사회가 조총련과 민단으로 분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영화 <박치기!>는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1968년, 교토의 조총련계 민족학교와 이웃 일반 고등학교 학생 사이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다. 일반고 학생 마쓰야마는 조총련계 학생 경자에게 반해 조선어를 공부하고, 북한 노래 ‘임진강’을 부른다.
#2000년대 이후
그럼에도, 살아간다
한민족의 유전자에 각인된 남다른 학구열은 삶의 터전을 옮기고도 식지 않았다. 자신의 후손이 번듯한 환경 속에서 올바른 교육을 받길 바라던 재일 동포 1세대는 자비를 들여 조선학교를 세웠다.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는 일본 땅에서 조선인으로 살아가는 학생들의 해맑은 모습을 보여 주는 동시에 일본 우익 세력의 협박과 폭압을 감내해야 하는 현실을 담아낸다.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성장하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디아스포라 아티스트
이타미 준(1937~2011) 제주 포도호텔, 방주교회 등을 설계한 재일 동포 건축가 이타미 준의 본명은 유동룡이다. 그는 1937년 도쿄에서 태어났으나 2011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한국 국적을 유지했다. 2019년 개봉한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가 그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기회의 땅, 아메리카
궁핍한 조선은 제 백성을 나라 밖으로 등 떠민다. 1902년 12월, 인천 제물포항에서 배를 타고 미국 하와이로 건너간 이들을 한인 최초 이민자로 기록한다. 하와이 이민이 성공했다는 허위·과장 광고가 만연하면서 1905년에는 1000여 명의 조선인이 계약 노동 이민으로 멕시코에 흘러 들어갔으나, 애석하게도 계약은 불공정했다. 멕시코의 악덕 농장주들은 한인 이민자를 노예처럼 부렸다. 당시 대한제국과 멕시코는 수교하지 않았기에 한인 이민자가 보호받을 길은 없었다.
시간이 흘러 1950년대가 되어도 나라는 여전히 국민을 지키지 못한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 부모를 잃은 아이가 북미로 떠났다. 1960년대에는 미국이 아시아계 이민 제한을 해제하면서 한국인 이민이 급격히 증가했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35만여 명이 미국 이주를 감행한다.
#1900년대
신미양요부터 계약 노동 이민까지
1871년은 고종 8년으로, 신미양요가 일어난 해다. 한 노비의 아홉 살 난 아들 최유진은 그해 주인집 농간으로 부모를 잃고 쫓기듯 조선 땅을 벗어난다.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그가 간신히 올라탄 배는 미국 뉴욕으로 가는 것이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1화는 뉴욕 브루클린의 한 거리에서 오르골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닥친 슬픔을 이겨 내려는 어린 유진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거리의 아이로 자라난 그는 의식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군대에 자진 입대해 어엿한 해군 대위가 되는데, 운명의 장난처럼 대한제국에 발령받아 고향 땅을 다시 밟는다. 미국인 유진 초이로서의 정체성을 견지하려 노력하지만, 풍전등화 같은 조선의 상황을 목도하고는 내적 갈등에 사로잡힌다. 비슷한 시기, 소설 <검은 꽃>의 인물들은 멕시코로 떠난다. 1905년, 인천 제물포항에서 일포드호를 탄 조선인 1033명이 긴긴 항해 끝에 멕시코 유카탄반도에 닿는다. 양반, 평민, 범죄자, 종교인…. 출신 성분이나 직업을 막론하고 모두가 농장 노예가 된다.
더위와 폭력과 착취 속에서 기진맥진한 이들은 머지않아 혁명과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생존하기 위해 있는 힘껏 몸부림친다. <검은 꽃>과 비슷한 시대적·공간적 배경을 다룬 영화 <애니깽>은 멕시코에서 조선인 인부를 부려 수확한 용설란의 일종인 에네켄(henequen)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1950년대
혁명의 시대를 건너다
멕시코에서 쿠바로 건너간 이민 1세대 임천택은 독립운동가였다. 다큐멘터리 <헤로니모>는 그 용감한 사내의 아들, 임은조의 생애를 이야기한다. 임은조의 또 다른 이름은 헤로니모 임. 그는 쿠바 한인 최초로 대학생이 되었고, 1950년대부터 동문인 피델 카스트로와 쿠바혁명에 동참하며 정치가로서 활약한다. 1995년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은 그는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각성하고, 쿠바 한인회를 조직해 한민족의 명맥을 잇고자 한다.
#1960~1990년대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나성특별시. 한국 이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정착지 중 하나인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별명이다. 1960년대 로스앤젤레스 직항편이 뚫리면서 이민과 정착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고, 도시에는 거대한 코리아타운이 조성된다. 예기치 못한 사고도 벌어진다. 1992년 4월 29일 일어난 일명 ‘LA 폭동’으로 한인 사회는 큰 충격에 빠진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후 방송된 시트콤 <LA 아리랑>은 성공한 중산층 이민 가족의 삶과 애환을 그려 인기를 끌었다. 영화 <미나리>의 주인공 제이콥과 모니카 부부는 이보다 조금 앞선 1980년대를 산다. 이들은 슬하의 남매 앤과 데이빗을 이끌고 캘리포니아의 한인 공동체를 떠나 아칸소의 농작지에서 새로운 터전을 꾸리기로 한다.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미국 땅을 밟은 할머니 순자는 멸치, 고춧가루, 한약, 화투장과 미나리씨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와서는 이 안쓰러운 가족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보듬어 안는다.
#2000년대 이후
주류 사회, 유리 천장, 정체성 혼란
2000년대에 이르러 미국 사회에 편입된 디아스포라의 다채로운 면면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솔직하고 건방지지만 유능한 의사 크리스티나 양을 연기해 아시아계 여성 캐릭터의 전형을 깨부순 배우 산드라 오는 2021년 드라마 <더 체어>에서 아이비리그 대학 영문학과 학과장 김지윤으로 분한다. 극 중에서 그가 이룬 놀라운 성취는 금세 가시밭길로 바뀐다. 노교수들은 젊은 학과장을 제멋대로 무시하고, 학생들은 아시아계 이민자라는 그의 출신 성분을 내세워 보다 엄격하게 정치적 올바름을 요구한다. 드라마 <파트너 트랙>의 잉그리드 윤도 비슷한 처지에 놓인다. 뉴욕 최고 로펌에서 일하는 그는 파트너 변호사가 되는 것이 유일한 목표다. 명석한 두뇌에 기민한 처세술, 빼어난 외모까지 갖춘 여성이지만, 상사는 그를 번번이 무시하고 그의 동료인 백인 남성 부하 직원만 추켜세운다. 김지윤과 잉그리드 윤, 이 두 사람에게 안정과 위안을 주는 건 가족이다. 추석에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먹는 따끈한 밥과 반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흥을 즐기는 동네 잔치…. ‘정’이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릴 수 없는 한국 고유의 공동체 문화가 이들의 영혼을 뭉근하게 어루만진다. 한국계 미국인 보컬리스트 미셸 자우너가 엄마를 암으로 떠나보내고 쓴 에세이 <H마트에서 울다>도 해물짬뽕, 고추장, 뻥튀기 같은 음식을 보고 눈물지었던 날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자우너에게 애증과 애틋함으로 얽힌 모녀 관계를 추억하는 방법은 미각이다. 김치, 잣죽, 된장찌개, 엄마가 생일에 끓여 준 미역국, 엄마 앞에서 발라 먹었던 간장게장을 되새기며 그리움을 달래고, 아픔에서 벗어난다.
디아스포라 아티스트
박이소(1957~2004) 한국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그는 한민족의 전통문화를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이며 현지 화단에서 주목받았다. 인천아트플랫폼에서 11월 27일까지 열리는 <코리안 디아스포라-한지로 접은 비행기>전에 가면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박이소, ‘이그조틱, 마이노리티, 오리엔탈’, 1990
아픔은 여전히, 아시아
186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조선 땅의 백성은 살 길을 찾아 만주로 떠났다. 특히 만주에서도 오늘날 지린성 동남부 지역인 간도로의 이주가 잦았고, 여기서 더 멀리 떨어진 연해주까지 나아가기도 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견디며 해외 망명길에 오른 독립운동가도 많아졌다. 이들이 오늘날 재중 동포와 중앙아시아 한인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1920~1950년대
독립운동과 항쟁, 그리고 망명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한층 격화한다. 영화 <봉오동 전투>는 1920년 한국 독립군 연합 부대가 중국 지린성 펑우둥(봉오동) 일대에서 벌인 무장 항쟁을 다룬 작품이다. 1932년에 벌어진 일본 육군 대장 우가키 가즈시게 암살 작전을 영화화한 <암살>은 여성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극 속에 김구·김원봉 등 실제 인물이 등장하고, 1930년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풍경과 간도 참변, 만주 이주 등의 사회상을 담아 긴박한 당대 분위기를 묘사한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1950년대, 독립운동가의 피와 땀이 무색할 만큼 한반도는 분열과 파탄에 이른다. 북한의 정치체제를 비판하며 정치적 망명을 선택한 청년 8인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모스크바 8진’이다. 다큐멘터리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은 당의 후원으로 모스크바 국립영화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 어떻게 집단 망명을 선택하고, 타지에서 어떤 생애를 보냈는지 짐작하게 하는 영상과 사진, 편지와 일기 등 기록물을 담담히 응시한다.
#2000년대 이후
-
척박한 생활, 미끄러지는 삶
중국 지린성 옌볜에서 재중 동포 3세로 태어난 장률 감독은 영화를 통해 경계와 변방을 탐구해 왔다. 그의 두 번째 장편영화 <망종>은 한국계 중국인 여성 최순희의 비극적 생애를 비춘다. 타향살이 중인 순희는 아들 창호를 데리고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김치를 담가 팔지만, 주위엔 그를 이용하고 착취하려는 사람뿐이다. 절망할 법도 한데, 순희는 좀처럼 울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비틀거리며 나아갈 뿐이다. -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카레이스키
동토를 뜨겁게 달군 고려인(카레이스키) 록 스타 빅토르 최를 기억해야 한다. 영화 <레토>는 1980년대 레닌그라드에서 당의 감시하에 록 밴드를 꾸리고 공연했던 빅토르 최와 그의 동료 뮤지션 마이크 나우멘코의 청년 시절을 그린다. 제목 ‘레토’는 러시아어로 여름이라는 뜻이다.
디아스포라 아티스트
변월룡(1916~1990) 그의 러시아 이름은 펜 바를렌(Пен Варлен)이다.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 고려인 화가의 존재는 2016년 3월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린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를 통해 재조명됐다. 그는 전쟁과 혁명의 시대를 온몸으로 뚫고 나간 예술가였다.
<KTX매거진>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